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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9회 부산평화영화제/★관객리뷰

<내 친구 정일우> 김동원 감독 씨네토크


<내 친구 정일우> 김동원 감독 씨네토크

모더레이터 : 허정식 프로그래머


작성자

관객심사단 : 송문경





허정식 : 이번에 저희 평화영화제에서 공식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아주신 김동원 감독님께서 심사만 하고 돌아가시기 아쉽잖아요? 그래서 관객과 만나 영화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지금부터 김동원 감독님과의 대화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인사말부터 간단하게 듣고 질문을 받겠습니다.

 

김동원 : 네 안녕하세요. 사실은 이 영화가 작년 10월 말에 개봉을 했었는데요. 이 영화 개봉 전에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관객들과 이 영화를 같이 볼 수 없었는데 오늘 이렇게 같이 보게 되어 뜻깊습니다. 아무튼 62일에 또 4주기가 돌아오는데요. 작년 3주기 즈음에 영화가 완성되었는데 다시 영화 보면서 신부님 생각도 하고,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보여서 조금 고칠까 뭐 여러 생각하면서 작품 봤습니다.

 

허정식 : 감독님,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드시려고 하신 게 언제부터이신거세요? 거의 30년 동안 하신 것 같은데..

 

김동원 : 아니, 그건 아닌데요. 사실은 편찮으실 때 나중에 영화를 만들 수도 있겠다. 신부님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워낙 제가 게을러서 그러지 못하고 있다가 신부님 돌아가시기 얼마 안 남았다. 며칠 후면 돌아가신다.’는 얘기를 듣고 장례식장에서라도 쓸 만한 동영상을 나 밖에는 만들 사람이 없겠지 이런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그것도 못 만들고... 그러다 주변에서 시간을 두고 긴 영화를 만들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있었고, 사실 저도 굉장히 만들고 싶었지만 자료가 없었어요. 상계동 부분밖에 없어서 여기저기 수소문하던 중에 평화방송에서 20년 전에 찍은 촬영본을 그대로 가지고 있더라고요. 보통은 촬영본은 지우고, 본방송 영상만 가지고 있는데, 그 방송 PD님이 왜 그랬는지 그건 그대로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것 말고도 여기저기서 조금씩 사진 같은 것 모았고 특히, 서강대에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정일우 신부 동료 중 모든 일을 사진으로 꼼꼼하게 기록하셨던 분이 계셨는데 그 자료실에 가니까 사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장편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허정식 : 그럼 이제 관객석에서 하고 싶은 질문이 많으실 것 같은데 지금부터 질문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하실 분? 의외로 질문이 없으시네요. 편하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근데 김동원 감독님은 워낙 강연, 질의를 많이 하신 베테랑이셔서 제가 옆에서 도와줄 필요가...

 

김동원 : 아니, 사실은 제가 질의를 잘 못하고요. 다행스럽게 이 영화는 질의를 몇 번 안했지만은 질의를 하게 되면 같은 얘기 반복하게 돼서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에요.(웃음)

 

허정식: 오늘 좀 더 괴롭혀 드리는 걸로.(웃음) 그럼 감독님 잠시 상계동 이야기를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김동원 감독님하면 푸른 영상을 떠올렸었는데 김동원 감독님하면 상계동을 먼저 떠올려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상계동과 감독님, 또 상계동과 정일우 신부님을 좀 연결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동원: . 사실 저한테도 상계동이 제 운명을 바꾼 곳이고, 정일우 신부님이 제 팔자를 고쳐 놓은 분이라고 할 정도로 상계동 이전과 이후의 저는 굉장히 달라요. 그 전의 저는 이장호 감독이라고 혹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제일 잘 나가는 상업영화 감독님 밑에서 조연출로 영화수업을 할 때고,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되어야지 하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때 틈틈이 제 시나리오를 써서 이장호 감독님과 제작자 분께 건네주곤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너는 영화에 별 소질이 없는 것 같다. 영화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였어요. 이런 얘기를 듣던 터라 굉장히 의기소침해있는 상태에서 상계동에 가게 됐어요. 상계동에서 모르고 있던 세상을 봤고, 저랑은 관계없는 분들이 어떻게 보면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되었고, 그래서 제 인생관이 바뀌었고, 다큐멘터리를 할 수 있었고. 아무튼 상계동에서 신부님이 왜 그랬는지 아직까지 잘 모르겠는데, 집에 가려는데 하루만 더 자고 가면 안되겠냐고... 그래서 뭐 그러겠다고 했어요. 제가 왜 그런 승낙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그 질문과 대답이 제 인생을 바꾼 거죠. 정일우 신부님이 말씀하신 그분들의 생명력, 용기 그런 것들이 저한테는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이 살면서 그런 것들을 내 안에서도 발견하게 되고, 세상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하게 됐고, 모든 게 바뀔 수밖에 없죠. 제가 상계동 주민들에게 처음 느꼈던 거리감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그분들이 대단해보였고 그러면서 시각교정도 하게 되고, 상계동을 통해서 세상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그 중간에 정일우 신부님 같은 분이 계셔서 세상을 어떤 태도로 봐야하는지 이런 것들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허정식 : 참고로 감독님의 초반 주요 작품 중에 상계동 올림픽이라는 상계동 철거민들을 다룬 작품이 있고요, 명성 6일의 기록이라는 작품에서도 상계동 주민들이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네 지금 질문이 들어오네요.

 

관객1 : . 사실 상계동 얘기가 나오니까 제 친구가 건설 회사를 다녔는데 상계동에서 건설 쪽의 일을 하면서 상당히 힘들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정일우 신부님은 1970년대에 청계천 오가시면서 사셨는데 거기를 떠나시잖아요. 어떤 계기로 삶의 현장에서 떠나기로 하신 건지, 정일우 신부님의 건강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그런 것을 아시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동원 : 사실 영화 속에서는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었는데요. 맨 마지막에 보면 이 영화를 정일우 신부님과 배 프란시스 신부님에게 바친다고 했는데 배 프란시스 신부님이 없었으면 정일우 신부님이 존재하지 못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회가 자유롭긴 해도 수도 공동체인 만큼 여러 규율과 규칙들이 있는데 청계천에 갈 수 있었던 것도 프란시스 신부님의 특별한 배려였거든요. 배 프란시스 신부님은 정일우 신부님 고등학교 때부터 선생님이셨고 서강대학교에서는 사람 연구소라고 노동 운동가들을 길러내는 일들을 하셨어요. 그리고 정일우 신부님 편에 서서 격려하고 지지했던 분이기 때문에 정일우 신부님이 그렇게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어요. 정일우 신부님이 괴산에 한 9년 계셨는데 예수회에서 사회 사도직을 맡으셔서 캄보디아를 포함한 외국 여러 곳의 예수회 공동체에서 여러 사람들을 관리하고 지도하는 위원장직을 하라는 명령을 받으신 거죠. 그래서 2년 동안 그 일을 하셨어요. , 정일우 신부님이 어디가실 때 2주정도 단식을 하면서 결정을 하세요. 괴산 가실 때와 떠나오실 때도 그렇게 해서 결심을 하신 것이고, 한편 예수회는 재성영성수련이라는 저도 잘 모르지만 중요한 영적 수련기간이 있어요. 한 달 동안 하는 건데 그걸 들어가시기 전에도 단식을 하면서 준비하세요. 원래는 2주의 계획으로 시작됐는데 나중에는 기간을 넘기고도 더하시겠다고 하셔서 한 달이 넘어가고 나중에는 56일 단식을 하셨어요. 그때 신부님이 (가슴을 가리키며) 이 안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단식을 조금 더 하면 나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른 분들도 모르시더라고요. 그래서 신부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 치료하시려고 단식을 하시나 보다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56일 동안 이어지니까 중간에 주변에서 강제로 단식을 중단시켰다고 해요. 그게 신부님이 갑자기 건강이 악화된 원인이라고 생각된다고 하는데 단식 때문이라기보다 단식 후에 몸을 추스르는 치료과정 중에 뭔가 잘못됐대요. 그런데 그 치료과정 역시 가톨릭 병원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안하신 것 같아요.

관객2 : 영화 초반에 정일우 신부님이 나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니, 세상에 저런 사람이 있나. 신부님이라 그런 건가.’ 생각하면서 현실성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다가 마지막 모습에서 인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감독님은 정일우 신부님의 어떤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으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김동원 : 제가 처음에 봤을 때는 그렇게 성인처럼 느껴지진 않았어요. 철거촌에서 처음 뵀을 때는 화장지 들고 변소 가는 모습부터 봤으니까요. 그리고 저랑 워낙 술도 많이 먹고 같은 텐트에서 자고 그랬는데, 뭐 암내가 지독해요.(웃음) 제가 좋아하긴 했지만 훌륭한 분이라기보다는 정말 재밌는 분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요. 사실 그렇게 보시면 영화를 제가 잘못 만든 건데 저는 정일우 신부님을 정말 평범한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정일우 신부님이 정말 청계천 가시기 전에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예수회고등학교 마치고 신학교 갔다가 서강대 다니시고, 60년대 미국의 인권 운동에도 전혀 참여하지 않았대요. 그런데 신부님이 청계천에 가서 말하자면 뒤통수를 맞은 거죠. 제가 상계동에 가서 뒤통수 맞은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자기의 어떤 권위주의 같은 것들이 옅어져갈 때 그게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느끼신 것 같아요. 정 신부님이 반쪽 세상만 살아왔다는 생각을 했는데 청계천 사람들로 말미암아 말하자면 정말 인간이 되어간거죠. 정일우 신부님이 그렇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잘못된 사람이었다는 걸 조금씩 깨달아 가는 과정이었고 그런 자리를 피하거나 전혀 그러지 않았어요. 정일우 신부님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부분이 가난을 즐길 줄 알았고, 그것이 이제 신부님을 굉장히 자유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건 어떻게 보면 크게 어려운 게 아니거든요. 물론 정일우 신부님께 본받을 점이 많지만, 그부분은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는 가난을 즐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고 사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닌 것 같아요. 이정도가 가난이라는 게 아니고 자기보다 조금 낮은 곳을 스스로 선택해나가는 과정이고 말하자면 내 권위를 벗어 던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걸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허정식 : 그래서 아까 감독님이 가난에 대한 내레이션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관객3 ;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영화 감동적으로 봤습니다.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저도 아파트 건설업종에 있고, 지금도 재개발을 계속 하고 있어요. 정말 안타까워요. 옛날부터 저는 반대를 많이 했고 정말 그대로 놔두는 게 나아요. 놔두면 서민들이 같이 어울리면서 살 수 있는데 왜 아파트들을 계속 짓는지... 상계동같은 경우에는 올림픽 때문에 외국인들이 지나가는 곳이라 그런 것이죠.

 

김동원 : 사실 모든 올림픽은 건설 회사를 위한 거죠. 올림픽을 내세우면서 개발해야한다는 논리가 생기니까요. 88올림픽 서울시내에 200군데를 한꺼번에 재개발을 했는데 그 명분이 바로 올림픽 때문이었던 거죠. 근데 사실은 말씀하신 것처럼 산동네나 이런 동네가 관광지가 될 수도 있고 그 판자촌을 부수고 아파트를 짓는다고 해서 더 많은 세대가 입주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재개발을 거치면서 겉으로는 되게 깨끗해 보이지만 사실은 일반 시민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거의 없고 그것을 공유하는 권력이 있겠죠? 아마 정치가들이 될텐데. 제가 만든 상계동 올림픽이 그 올림픽이 있을 때마다 특수를 타요. 그래서 베이징 올림픽 할 때도 상계동 올림픽을 보여 달라고 하고, 도쿄 올림픽 때도 상영하겠다고 하고 그러니까 이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어디나 똑같은 것 같아요. 상계동 올림픽에서는 이제 처음에 철거될 때는 88올림픽 때문에 도시미화 이런 차원이었고 뒤에 부천에서 그 공동주택을 못 지은 것은 경인고속도로 바로 도로변인데 고속도로에서 성화가 지나간다고 해서 또 철거를 당하고 결국은 좀 묘하게 88올림픽하고 상계동 주민들하고 계속 어긋났던 것 같아요.

 

허정식 : 감독님, 영화 제목을 아주 잘 짓는 것 같아요. 다음 질문 듣도록 하겠습니다.

 

관객4 : 영화 보면 제정구의원이 나오시거든요. ‘상계동 올림픽에도 제정구의원이 나오는데 일단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제정구의원을 모르는 사람들도 좀 많은 것 같은데 그 제정구의원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으면 고맙겠고, 정일우 신부님이랑 제정구의원님이 어떻게 만났고 영화에 담지 않았던 내용이 있으면 짧게 소개해주십시오.

 

김동원 : . 제정구씨가 50대 이상 연배에게는 낯선 이름이 아니겠지만 그 이하 연령대에게는 좀 낯선 이름일수도 있겠는데요. 처음에는 민주당 의원이었다가 나중에 한나라당으로 가셨고요. 그것 때문에 굉장히 큰 논쟁이 있었던 분인데 저도 사실은 이해를 못하고 그 다음부터는 제정구씨를 잘 안보고 그랬는데 제정구씨가 그 당시에 김대중씨와 갈등이 좀 있었나봐요. 그래서 김대중씨에 대해서 비판도 좀 하셨고요. 그 당시에 한나라당에 대학 동기들도 있었고 제정구씨는 특히 재개발에 관한 민법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그걸 하려면 한나라 당에 오라는 제안을 많이 받았다고 해요. 아무튼 거기에 대해서는 한 70%이상 많은 사람들이 제정구씨가 좀 변했다고 평가를 했는데 그 와중에 정일우 신부님은 물론 고민을 많이 하셨겠지만, 정구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라는 식으로 많이 말씀하셨다고 해요. 근데 그게 사실 바로 정일우 신부님의 캐릭터거든요. 뭘 하지 말라고 하시는 그런 법이 없었으니까요. 그러고 이제 청계천에서 제정구씨가 73년도에 야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서울대 신입생 시절이었는데 긴급조치위반인가 일종의 도발인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만나게 되신 거고, 그런데 그 때 제정구씨의 부인인 신명자씨도 야학선생이었고 그러면서 이제 의기가 맞아서 정일우 신부가 양평동으로 가니까 제정구씨도 양평동으로 가시고, 보금자리 마을에까지 같이 가고. 그렇게 된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대답이 되었나요?

 

허정식 : , 그러면 다음 질문 있으시면 왠지 좀 영화가 숙연해서 그런지 다들 고개를 숙이고 계세요.(웃음)

 

관객5 : 상계동 주민들과 인터뷰를 시도했을 때 아픈 기억이니까 회피하려고 하시는 모습이 보였는데요. 정일우 신부님이 상계동을 떠났을 때, 정신적 지주가 떠나신 거니까 무모함 같은 것들이 대단했을 것 같은데 인터뷰하려고 주민들 접촉했을 때 주민들의 생각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김동원 ; 주민들이 정일우 신부님에 대해서 섭섭해 하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고요. 사실 정일우 신부님도 그 곳에서 떠난 것처럼 내가 이야기 했지만 확실히 모르겠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그런 경향이 있으시겠지만, 저는 도시빈민들에게 실망하셔서 괴산으로 내려가신 게 아닌가라는 말을 어디서 듣고 그렇게 생각도 했지만 그게 꼭 맞는 건 아니에요. 그 당시 91,2년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서강대 박홍 신부가 자살한 학생들을 비난하고 그러면서 박홍 신부가 정일우 신부님 제자뻘인데 둘이 언쟁이 있었고, 그런 갈등 때문에 내려가셨다고 생각하는 예수회 신부들도 계시더라고요. 괴산 내려갈 때도 괴산 한번 다녀오시고 나서 2주 동안 단식기도를 하시면서 최종적으로 내려가신 걸 보면 꼭 그렇게 인간적인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상계동 주민들이 1년에 한 서너번씩 모이셨거든요. 부천에서 마지막 공동주택을 짓지 못한 것은 역설적으로 보자면 그 당시 선금과 천주교에서 온 지원금해서 이백 몇 십 평 정도의 땅을 샀어요. 근데 땅을 살 때는 30만원 정도에 샀는데 2년 후에 250만원 이상으로 뛰어버렸어요. 그런데 천주교에서 잘못한 게 천주교에서 아마 그 땅을 관리하고 공동주택을 짓고 주민들에게 소유권을 주지 않고... 주거할 권리만 주었더라면 그런 일이 좀 안 일어났을 수도 있는데 천주교에서 너무 이제 골치가 아프니까. 그리고 이제 한편으로는 교회가 이제 뭐 부동산 투기 같은 것을 한다 이런 오해를 받기 싫으니까 그 분란이 일어나서 결국은 자기 몫의 8평씩 그렇게 돌아갔을거에요. 250X8하면 1500되잖아요. 그거 가지고 당시에 빌라를 살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처리해 버린 사람이 많아요. 그리고 또 그걸 나누는 과정에서 먼저 나간 사람들이 내 몫도 있다고 하시면서 끔찍할 정도의 분쟁을 일으켰었죠. 그런 분쟁은 정일우 신부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이후에 주민들이 그래도 1년에 몇 차례씩 모이곤 했어요. 누구 돌아가시거나, 자식이 결혼하거나, 1년에 한 번씩 송년회 같은걸 했는데 맨 마지막에 나오던 아저씨가 항상 연락을 하셨는데 2005년 무렵부터는 연락을 안하시더라고요. 연락해도 주민들이 시큰둥하대요. 그래서 나도 같이 하겠다고 연락을 했는데 시큰둥해요. 그 이유가 여러 가지인데 이제 할머니가 돼서 무릎이 아파서 외출을 못한다, 그리고 자제들이 다 결혼해서 본인은 괜찮은데 결혼한 상대방 쪽에서는 철거민 출신인 걸 모르는데 알리기 싫은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요새는 모이자 하는 3,4명만 모이고 그래요. 영화에서도 아주머니 한분은 기억 안 난다고 하시도 다른 한분은 너무나 끔찍해서 기억하기 싫다고 얘기를 하시잖아요. 두 번째 아주머니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기억이 안 난다는 건 거짓말이고 기억하기 싫은 거죠. 어쩌면은 정말 지치기도 한 거 같아요. 그런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그 분들도 옛날에는 다 평범했던 분들인데 투쟁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헐크가 됐었는데 그때 다시 보통 사람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허정식 : 그러면 이제 감독님의 최근 근황과 소문에는 대학 그만두시고 오지로 가셨다던데 최근 활동이 어떤지도 여쭤보겠습니다.

 

김동원 : 제 버킷리스트에 있던 남미 여행을 한 6개월인가 갔다가 지난달에 돌아왔어요. 근데 콧구멍에 바람이 들어갔는지 그게 자꾸 생각이 나서 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요즘 남북관계가 진전하고 있으니까 송환에서 비전향자로 계시던 분이 이제 (북으로) 갔잖아요. 이제 송환속편을 전향자 중심으로 찍고 있어요. 그분들이 희망을 잃고 있었는데 요새 다시 아 (북으로)갈 수 있을 수도 있겠다는 기운을 가지셔서 조금씩 저도 이제 그 좀 시동을 걸고 있고요.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동안 못 두었던 바둑 열심히 두고 있습니다.

 

허정식 : 송환 마지막 부분이 떠오르는데요.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하셨던 것 같은데 아직 생존해 있는 분이 계신건가요?

 

김동원 : 한 절반정도 살아 계신 것 같고요. 거기 주인공이셨던 조창손 선생님도 생존해 계시고요 .

 

허정식 : 영화 봤을 때 개인적으로는 만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시대가 바뀌니까 감독님의 새로운 일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해주시고 이제 폐막식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김동원 : 딱히 드릴 말씀은 없고요. 영화제목을 내 친구 정일우라고 지었잖아요. 저도 신부님이라기보다 재밌는 친구란 생각이 들고요. 여기 등장하시는 제정구씨 부인 신명자씨도, 괴산에 계시는 할머니도 제 친구라고 하시잖아요. 신부님은 누구하고나 격의가 없으신 분이에요. 그래서 요새같이 각박한 세상에 영화를 통해 정일우 신부님을 여러분이 친구로 맞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희망을 해봤거든요. 신부님에 대해 궁금한 게 더 있으시면 몇 가지 책도 있어요. 제정구씨와의 관계에 관한 책도 있고, ‘정일우 이야기라는 책도 보시면 좀 더 자세하게 아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신부님을 오래오래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