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8 제9회 부산평화영화제/★관객리뷰

<내 친구 정일우> 김동원 감독 씨네토크


<내 친구 정일우> 김동원 감독 씨네토크    

모더레이터 : 허정식 프로그래머



작성자

관객심사단 :  성민지

 

감독 : 나중에 영화를 만들 수도 있겠다 빨리 신부님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제가 워낙 게을러서 못하고 있다가 신부님이 며칠 후면 돌아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때 장례식 때라도 쓸만한 동영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생각보다 빨리 돌아가셔서 못 만들고 주변에서 시간을 가지고 긴 영화를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가지고 만들기 시작 그러나 자료가 부족하고 상계동 자료밖에 없어서 자료를 찾던 중 마침 평화방송에서 20년전 찍었던 촬영 분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그 프로그램을 맡은 피디님이 그걸 그대로 가지고 계셔서 그게 괴산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것 이외에도 이곳 저곳에서 모음  특히 서강대의 정일우 신부 동료 신부님께서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하시는 분이 많이 사진을 꼼꼼하게 촬영을 해놓으셔서 영화가 장편으로 까지 이어질 수 있었음


진행자 : 관객석에서 질문을 유도 , 감독님이 워낙 gv를 많이 하시는 베테랑 감독님이시니 따로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감독: 사실 제가 gv를 잘하는 편이 아닙니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행자: 감독님의 상계동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감독님의 푸른 영상을 보고 감독님 하면 상계동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상계동과 감독님, 상계동과 정일우 신부님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감독님 : 사실 저한테는 상계동은 저한테 운명을 바꾼 곳이고 상계동이전의 저와 상계동 이후의 저는 굉장히 다름 그전에는 그 당시 상업영화 감독님 밑에서 조연출을 영화 일을 하였고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음 그러나 틈틈이 시나리오를 쓰고 준비를 해서 여러 곳에 시나리오를 보여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담했다. 굉장히 의기소침해 있을 무렵에 상계동을 가게 되었고 상계동에서 모르는 세상을 보게 되었고 저랑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이 되었고 저의 인생관이 바뀌었고 다큐멘터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하여튼 신부님이 집에 가려고 하는 순간 하루만 더 있다 가지 않겠냐고 말씀하신 제안이 신부님이 왜 제안을 하셨는지도 모르고 왜 승낙을 했는지도 모르겠으나 그 질문과 대답이 인생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상계동 사람들을 그 환경을 통해서 모르는 세상을 알게 되었고, 자신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통해서 거리감이 줄어들고 가까워지고 오해도 사라지고 처음에는 그분들이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정일우 신부님이 말씀처럼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기와 용기가 저에게는 없었던 것이고 같이 살면서 그런 것들이 내 안에도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고 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에게 처음 느낀 감정이 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시각교정도 있었지만 그러나 저는 상계동을 통해서 세상을 배우게 되었다고 말씀 드릴 수 있고 그 중간에 정일우 신부님 같은 분이 계세서 세상을 어떤 태도로 보게 될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진행자 : 감독님 초반의 작품 중에는 상계동 올림픽처럼 상계동을 배경으로 다룬 작품이 많습니다..


관객 : 상계동 이야기가 나오니까 제 친구가 건설 쪽에서 일을 해서 상계동에서 굉장히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정일우 신부님께서 청계천으로 가시게 되시면서 상계동 시골로 들어가시게 되는 어떠한 이유로 삶의 현장에서 떠나시게 되었는지 그것이 또 정일우 신부님의 건강상의 문제와 연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감독님: 영화 속에서는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에 정일우 신부님과 배 프레스 신부님에게 받친다는 말이 있는데 프레스 신부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정일우신부님도 계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회가 비록 자유롭기는 해도 이곳 역시 수도 공동체이기에 여러 규율들이 존재함. 청계천을 갈수 있었던 것도 프레스 신부님의 특별한 배려였고 그 신부님이 정일우 신부님의 고등학교 때부터 은사님이시고 서강대학교에서 노동운동가들을 길러내는 데에 일을 하셨습니다. 완전한 정일우 신부님 편에서 격려하시고 그의 배려 덕분에 정일우 신부님이 자유롭게 활동 하실 수 있었음, 정일우 신부님이 괴산에서 9년 정도 계셨는데 그 이후 예수회에서 사회사도직(예수회 공동체에서 살지 않고 여러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관리 지도하는 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이 결정을 하시기 전에는 2주일 정도의 단식을 하면서 마음을 정하시는데 또한 그 이외의 사유로 단식을 결정을 하셔서 2주일 정도를 진행하시는데 신부님의 선택으로 연장하셨고 몸이 좋지 않으셔서 그것을 치유의 방법으로 단식을 하나 싶으셔서 지켜보고 있었으나 56일 정도의 단식을 하신 후에 몸을 추수리는 과정에서 여러 추측이 난무하나 그러한 이유로 신부님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가 되셨다. 치료 이후로 몸이 조금은 추스려졌으나 그 이후부터 점점 쇠퇴하셨다.


관객 : 영화를 보면서 정일우 신부님의 처음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 이런 분이 계실 수 있을까 정도의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으나 마지막에 병으로 인해 나약해진 모습에서 인간이라고 느꼈는데 감독님은 정일우 신부님과 함께 오랫동안 행동하시면서 지켜 보시면서 정일우 신부님의 어떠한 모습을 담고 싶었는지 궁금합니다.


감독님 : 청계천에서 감독님을 처음 보았을 때 성인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신부님을 좋아하고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고 저는 영화 속에서 신부님을 정말 평범한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정일우 신부님이 청계천에 가기 전에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삶을 사셨고 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에도 관심이 없었고 마치 제가 처음 상계동에 갔을 때 느꼈던 감정처럼 신부님도 청계천에 가셔서 그런 감정을 느끼신 것 같다. 청계천에서 신부님이 자신이 얼마나 비 인간적이었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얼마나 반쪽 짜리 인생을 살았구나 점차 그 삶 속에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훌륭한 성인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잘못 살았었구나를 조금씩 깨닫는 과정 그러한 과정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정일우 신부님을 특별하다고 표현하고 싶은 부분은 가난을 즐겼고 가난을 자신을 자유스럽게 만들어 주었다라는 점이 존경한다. 제가 신부님을 따라가기가 많이 부족한 것 알지만 가난을 즐긴다는 표현에서 그것은 그렇게 어렵지가 않다. 어떠한 기준을 만들어서 이 정도면 가난하다가 아니라 지금 자신이 가진 것 보다 조금 내어 주면 그것이 가난한 것이며 나의 권위를 벗어 버릴 수 있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진행자; 감독님이 내레이션으로 가난에 대해서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객 ; 저도 건설업에서 일을 하면서 재건축 사례를 많이 보는데 그 과정마다 안타까운 일이 많으며 이것을 그대로 놔두면 싶은 경우도 많습니다. 상계동 같은 경우에는 올림픽 시기에 외국인들이 지나가는 길목이여서 재건축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감독 ; 사실은 모든 올림픽은 건설회사를 위한 것이다,. 올림픽을 내세우면서 개발을 해야 한다는 논리로 생기니까 88올림픽 때도 그전에 중동지역에서 공사를 하면서 몸집을 많이 키웠는데 중동시장을 끝나고 난 후에 여러 자본과 기계를 돌려야 하니까 서울 시내의 200군데를 한꺼번에 재개발을 하게 되는데 그 명분이 올림픽 때문이었습니다. 근데 사실은 말씀처럼 산동네나 그런 동네가 관광지가 될 수 도 있는데 판자촌을 부수고 아파트를 짓는다고 더 많은 세대가 입주 하는 것도 아닌데 재개발을 거치면서 겉으로는 깨끗해 보일 수는 있지만 일반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거의 없고 건설회사의 이득이나 그에 따른 권력층의 이득이 남을 것이다. 그런 것이 꼭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올림픽 있을 때 마다 특수를 탄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상영을 하겠다고 영화를 요구함. 상계동 올림픽에서 보여주는 것은 처음에는 철거할 때는 올림픽 때문에 도시미화의 이유로 철거되지만 뒤에 부천에서 공동주택을 못 짓는 것은 그곳이 경인고속도로 지역이고 그곳에서 성화가 지나간다는 이유로 무산이 되었다.


진행자 : 감독님이 영화 제목을 매우 잘 지으셨습니다.


관객: 영화를 보면 재정구 의원이 나오는데 여기 있는 젊은 사람들 중에는 의원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재정구의원과 정일우 신부님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독님 : 제정구씨가 50대 이상의 연배는 낯설지가 않지만 그전에 분들은 낯설 수가 있는데요 국회의원 하셨고요 처음에는 민주당이었다 후에 한나라당으로 가셨고 그것 때문에 많은 논쟁이 있었다. 우선 이 이야기부터하면 제정구씨가 그 당시 김대중씨와 문제가 있어서 굉장히 비판을 하게 되어 사이가 틀어지고 그 당시 한나라당에 자신들의 대학 동기들이 있었고 제정구씨가 원하는 재건축에 대한 입법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당의 성격을 바꾸게 되어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으나 정일우 신부님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지켜보심. 그것이 정일우 신부님의 캐릭터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으심. 청계천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제정구씨가 청계천에서 야학을 하면서 만나게 되었는데 제정구씨의 부인 역시 야학의 선생님이었음, 그 이후 정일우 신부가 양평동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제정구씨도 같이 양평동으로 가고 후에 보금자리 마을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진행자 : 영화가 숙연해서 그런지 관객분들도 숙연합니다.


관객 : 상계동 주민들이 후에 정일우 신부님 인터뷰하고자 했을 때 아픈 기억이라고 상처가 깊게 남아있다고 인터뷰를 회피하는 모습에서 정일우 신부님이 상계동을 떠났을 때 느낌이 궁금하고., 영화를 보면 상계동사람들이 하늘이 지붕이다라는 표현을 하면서 그 순간을 극복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근데 신부님이 떠나시고 나서 공허함, 정신적 지주가 떠났을 때 주민들이 느끼는 허탈감이 컷을 듯 싶습니다.


감독님 : 주민들이 정일우 신부님한테 섭섭하고 이런 것은 전혀 아니고 정일우 신부님도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괴산으로 가시는 이유가 도시빈민들에게 실망을 하셔서 내려간 것이 아닌가 저를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상은 하지만 그것이 꼭 맞는 대답은 아니다. 그 당시 91년도 서강대의 박홍신부가 자살한 학생들을 비판하는 모습에서 갈등이 빚어졌고 그래서 신부님이 괴산으로 가셨다는 예수회 신부들의 추측도 있으며 꼭 한가지 이유만은 아니고 괴산을 한번 다녀오신 후에 2주일 동안 단식을 통한 고민을 하시고 괴산행을 선택하시는 이유에서 꼭 인간적인 이유만을 가지고 선택 하신 것 같지는 않음. 상계동 사람들이 그 이후에도 1년에 한 두번씩 모임을 가졌는데 부천에서 마지막에 공동주택을 짓지 못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따지면 그 당시 땅을 샀는데 그 때 모인성금과 천주교에서 온 지원금을 모아서 샀는데 2년후에 가격이 많이 오름. 가격이 오르니 주민들이 자신들의 몫을 원함. 공동주택이 아닌 자기 몫을 조금씩 가지게 되면 그 돈으로 빌라를 사서 떠나게 됨. 그전에 나간 사람들도 다시 돌아와 자신들의 몫도 있다고 주장하는 등 끔찍한 일들도 일어났었다. 주민들이 그 이후에도 1년에 몇 차례씩 모이긴 했었으나. 2005년 이후부터 매번 모이자 하시던 분들이 연락이 뜸해짐. 연락을 해도 주민들 역시 시큰둥한 반응 여러가지 이유로 하나는 할머니가 되어서 손녀를 봐야 한다는 이유도 있고 몸이 편치 못하다는 이유 자제들이 결혼한 이후 자기는 괜찮은데 결혼한 상대방이 철거민 출신임을 모르고 그것을 알리고 싶어하지도 않아함. 점차 모여지는 인원수가 적어짐. 화면 속에서 기억하기 싫다고 표현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말씀처럼 본래 평범했던 분들인데 투쟁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헐크가 되었는데 다시 보통사람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지친 것 같다.


진행자: 더 이상의 질문이 없으시면 감독님의 최근 근황에 대해서 듣고 싶고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감독님 :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남미여행을 작년10월에 떠나서 지난달에 돌아왔습니다. 6개월정도의 여행을 하고 다시 또 가고 싶어짐. 사실 송환의 후속 편을 전향자 중심으로 찍고 있었는데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다가 남북관계의 진전으로 다시 작품의 시동을 걸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영화의 제목이 내 친구 정일우인 것처럼 격의가 없으신 분이고 그렇기에 영화를 통해서도 관객과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되고 요즘과 같은 각박한 세상에 여러분이 신부님을 친구로 맞을 수 있으면 좋을 듯 싶다. 아무튼 신부님을 오래오래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