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관리 메뉴

부산평화영화제 아카이브

<바람의 세월> GV 본문

2024년 15회 부산평화영화제/기록문

<바람의 세월> GV

부산평화영화제 아카이브 2025. 5. 15. 14:38

일시 : 2024년 10월 25일 14:45

장소 : 모퉁이극장

참석자 : 정진아(모더레이터), 문종택(<바람의 세월> 감독)

작성자 : 백주현

 Q. 어떻게 해서 이 작품을 만들게 되셨는지 그리고 이 작품 같은 경우는 공동 연출을 하셨는데 하신 이유는?

A. 먼저 부산평화영화제에서 바람의 세월을 초청해 주신 관계자분들게 감사드린다. 작품을 만들게 된 이유는 세월호 진상규명과 또한 그 피해자 부모님들의 동선이 어떻게 흘러가며 어떤 일을 하시며 어떤 몸부림을 치시며 그런 것들을 다 기록하기 위해서 영상을 찍었다. 10년 동안 영상을 찍다보니 언론인, 영화감독들과 많이 접촉을 하게 되었는데 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사람들이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모른다. 그래서 이것을 알리자’라는 말에 확 넘어갔다. 공동연출을 한 이유는 내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촬영을 한 것은 단 한 건도 없다.

Q. 방대한 영상 자료를 가지고 영화로 만드는 작업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드시면서 힘드셨던 부분은?

A. 과거의 기록들, 언론을 통해서 나온 기록들, 정부 기관들의 세월호에 관한 기록들을 다 찾아내고 그걸 또 제가 기록하는 과정들이 많이 있다. 그러다 보니 10년간 모은 방대한 기록들을 영화로 만들 때 추스르는 과정이 힘들었다. 10년의 기록을 추스리는데 거의 100일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석 달 넘게 걸렸다고 하는 의미는 영화감독을 하시는 분들한테는 2년, 3년이 걸리는 시간이다. 영상을 추스르는 100일 동안 2시간, 3시간을 자면서 지냈다. 이런 과정 때문에 영화를 제작하는 시간이 많이 길어졌다.

Q. ‘바람의 세월’이라는 의미는?

A.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람일 수도 있고 간절한 바람일 수도 있다. 제목을 정했을 때 재미있었다, pd님과 저 포함 4명이서 회의를 맣이 했었는데 ‘세월’을 먼저 정했었다. ‘세월’ 앞에 무엇을 붙이느냐 해서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나왔지만, 바람의 세월에서의 바람이 제가 팽목항에 갔었을 때 팽목항이 우리 아이들이 올라올 때 시신을 버려두었던 곳이다. 팽목항에 갔을 때 바람이 강하다고 느꼈다. 내 몸에 부딪히는 바람이 세다는 의미와는 달랐다. 조금 다른 바람이지만, 부산 화명동에 매주 목요일 우리 부산 시민들이 아직도 세월호 촛불을 들고 계신다. 매주 우리 부산사람들의 바람도 참 대단하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베어내는 말들을 다 견뎌내주시는 소리와 바람 그런 것들을 다 묶어서 바람의 세월이 정해졌다.

소감 1 :

보통 GV를 많이 가면 첫 번째 스타트를 하고 나면 그다음부터 관객분들이 쉽게 참여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말하는 소감을 들어보시면 이게 별로 어려운 게 아니다 라는 걸 알려드리기 위해서 처음 손을 들었습니다. 모더레이터님과 감독님 두 분이 앉아 계시는 뒤에 스크린에 부산평화영화제 바람의 세월 이렇게 보이는데 전쟁 너머 평화라는 슬로건으로 이제 영화 프로그램을 구성하게 되었고 이야기를 듣는데 그 전쟁 너머 평화라는 그 문장의 어떤 무게가 좀 많이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거를 이렇게 계속 진상 규명을 위해서 애쓰셨는데 그 온도에 되게 많이 응답해 드리지 못했다 라는 부채감도 굉장히 많이 들었고 또 화명동에서도 계속 시위를 하고 계시다고 하셔서 뭔가 이제 행동을 해야겠다 라는 그런 마음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제 금요일 이 시간에 사실 와주신 관객분들 정말 100명 같은 한 명이라고 생각하고요. 오늘 이 바람의 세월을 통해서 또 새로운 어떤 바람들이 계속 만들어져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소감1에 대한 감독님의 답변 :

제가 아까 울컥해서 감정을 누르느라고 말을 조금 버벅거렸다. 이 영화를 만든 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젊은 분들 때문에 이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절대 한번만 봐서는 소화가 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적어도 3번은 봐야 한다. 얼마나 긴 세월을 압축을 했고 단원고등학교에서 일어났었던 일들을 세월호 활동을 많이 하시는 활동가분들도 잘 모르실 정도로 이 영화는 정말 세월호의 만 분의 1 정도만 담겨져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3번 봐야 한다. 다음 세대들이 세월호 관련해서 이 영화를 통해서 좀 풀어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져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감사하고 너무 고맙다.

소감2:

저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진짜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다. 그때 당연히 다 해결되어 있어 줄 알았다. 그리고 이제 부산에는 아무래도 좀 보수쪽이 많은데 그때 사람들이 세월호가 일어났을 때 유가족들을 비난하는 말이 많았다. 그런 사람을 뽑고 나서 그런 일을 당하고도 또 더한 사람을 뽑아서 지금 이렇게 국민들이 힘든데 사실은 제가 이 영화도 기부 형식으로 예매만 해놓고 안 보려고 했다. 왜 그러냐면 저는 유가족이 아니어서 이 그런 사람들이 처벌을 안 받은 것 때문에 그 분노 때문에 마음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걸 해결해줘야 되는데 그걸 해결을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람들을 믿고 계속 그거를 요구를 해야 된다는 사실로 인해 지금 제일 힘드실 것 같다.

소감 2에 대한 모더레이터의 답변 :

저도 그날이 기억이 난다. 저는 그때 부산의 국도예술관이라는 예술영화극장에서 일을 했었다. 그날 배가 고파서 첫 영화를 틀어 놓고 예술관 앞에 있는 칼국수 집에 갔다. 칼국수를 먹으면서 뉴스 특보가 나왔었다. 그때까지 배가 바로 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아무 일 없이 돌아올 거라고 소감을 말씀해주신 관객분과 똑같이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월호가 완전히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보고 너무 어이가 없었고 그게 이 영화에도 부모님도 다 그 상황을 겪으셨기 때문에 그 마음은 아마 모두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다이빙벨을 상영했었을 때 저희 극장이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었고 그때부터 극장에 대한 핍박이 엄청 났었다. 그래서 1년 동안 국가의 지원없이 버틴 적이 있었다. 그 정도로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소수의 인권, 작은 목소리, 작은 힘들이 정말 눌림을 당하는 시기가 왔었다. 저는 처음에 세월호 팔찌 하나 차는 거에 ‘내가 세월호를 알고는 있지만 이 팔찌 하나 찾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리고 괜히 내가 뭔가 그들을 위하는 것 같은 척하는 사람인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니까 이 팔찌가 차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1년 지나고 나서 1주기 때 이렇게 또 영화를 상영하고 GV를 하면서 이들이 원하는 건 같이 힘이 되지는 못하지만 잊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 영화에서 우리가 항상 얘기하는 거는 잊지 않기를 바라는 거, 잊혀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항상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이 세월호 팔찌가 나한테는 잊지 않을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장치였다. 그러니까 평상시에는 잊고 살더라도 항상 팔찌가 눈에 보일 때 우리는 국가 폭력 앞에서 우리 모두가 힘들었고 세월호를 겪었던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었던 일이기 때문에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 잊지 않아야 된다는 것에 하나의 장치가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한 뒤로는 굉장히 팔찌를 차는 게 자유로웠다. 그전까지는 팔찌를 차는 행위가 족쇄 같았고 팔찌를 찬다고 그들의 슬픔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었다면 지금은 팔찌를 차는 행동이 우리 모두가 겪었던 국가 폭력 앞에서의 나의 위치이고 나의 힘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항상 그대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런 것들이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마음이 이제 우리가 이 세월호를 계속 이야기해야 되고 지금도 이런 것들이 또 정치적인 것에 눈을 뜨게 하고 있다. 저는 이게 그냥 세월호 영화가 그들의 슬픔을 보자는 게 아나라 그걸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국민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언제나 이렇게 핍박받아야 되고 언제나 목소리를 내는 등 옳은 방법들에는 우리가 빠져 있구나 라는 것을 이분들을 통해서 그리고 서로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시간에도 이 자리에 와 계신 분들이 너무 대단하다는 생각한다. 말이 길었지만 그래서 그 마음이 너무 잘 전해지는 것 같고 이게 단순히 유가족만의 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소감 3 :

저는 화명동에서 촛불집회 활동을 했던 김기호 라고 합니다. 저는 촛불집회를 하면서 제일 무서운 게 뭐냐 하면 무관심입니다. 저희들이 촛불을 들 때 제일 먼저 듣는 소리가 ‘고맙습니다’ 두 번째가 ‘빨갱이냐’ 세 번째가 ‘유가족이냐’ 네 번째가 ‘전라도에서 왔느냐’라고 물어봅니다. 이게 그래도 관심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무관심이라는 게 제가 화명동 촛불집회에서 8년 동안 했고 지금 또 구포시장에서 2년째 지금 하고 있는데 한 천 명이 지나가면 말을 건네는 사람은 한 10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1% 정도 되죠. 그중에서 고맙다고 하는 사람은 한 3명 정도 됩니다. 그리고 욕하는 사람이 한 7명 정도 됩니다. 결국 이 10명이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대해준다는 거죠. 나머지 970명은 그대로 지나갑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오늘 여기 오신 분들 너무 고맙습니다.

소감 3을 듣고 난 후 감독님의 말 :

바람의 세월은 사실 극장에서 상영이 다 내려졌습니다. 젊은 분들이 오셨는데 보시는 방법은 다양한 OTT에 영화가 올라가 있습니다. 지금 가격도 많이 내렸더라요. 소장용으로 구매하면 계속 무제한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바람의 세월을 제작할 때 5가지 정도의 제작 조건을 약속을 받고 이 영화를 만들었어요. 대한민국에 있는 영화관들에 출품을 하지 않는다.(맥락 해석상 영화관이라고 기재) 그리고 영화에 관객들이 보기에 자극적인 장면은 넣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월호와 관련된 영상을 보시면 처음 장면이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헬기 소리가 들리는 장면 등과 같이 자극적인 영상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극한의 장면들 그리고 극한의 울음, 극한의 통곡들 등 자극적인 장면들은 다 걷어내고 사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건들을 달면서 영화를 만들었어요. 지금도 세월호 관련 영화를 보시는 분들은 그런 자극적인 장면로 인해 힘들어서 안 보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으세요. 제가 세월호 활동을 하면서 또 이제까지 지내오면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직접 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관객들이 힘들어하는 영상이나 자극적인 영상을 걷어냈는데도 불구하고 다 걷어낸 게 이 정도입니다. 아무리 걷어낸다고 하더라도 세월호 자체가 무겁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건 아까 앞에서 세 번을 보라고 하는 그 의미가 한 장면, 한 장면, 그리고 자막 하나하나를 다 검열했습니다.

정말 딱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영화를 보셨을 때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화면이 좌로 우로 흔들리는 화면이 있었습니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셨나요? 10년의 긴 이야기를 하는데 영화를 다 줄이고 줄여서 만들었더니 봤더니 제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구요. 제가 다 자르고 감독님과같이 편집을 했는데 이제 편집을 다하고 나중에 영화 전체를 보니까 제가 찍은 영화를 내가 내용이 무엇인지도 몰랐었습니다. 흔들리는 장면에 나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세월호 바깥에 어떤 어머니가 이야기를 하면서 세월호가 흔들리고 그다음 장면이 세월호 안에 들어가서 창문에서 비가 내리는데 카메라가 서 있던 자리가 아이들이 있었던 객실입니다. 카메라가 흔들리는 소리를 여러분들은 아마 못 들으셨을 겁니다. 다음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 영화를 보시게 되면 카메라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실 겁니다. 제가 지성이가 묵었던 객실에서 카메라를 세울려고 했는데 지성이가 '빨리 안 나가'라고 해서 지성이가 있었던 객실말고 다른 객실에서 그 카메라를 세웠습니다.

생존자 아이들이 아직까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돼서 그 생존자라고 하는 당연히 정상적인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생존자’라는 말을 넣을 수가 없어서 3일을 고민을 했어요. 여러분들은 그 자막을 그냥 보셨겠지만 3일 동안 고민하다가 찾아낸 게 ‘우리’였습니다. 단원고 아이들이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고 처음으로 학교를 등교하는 날 ‘생존자 아이들 첫 등교’ 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나오면서 그 아이들이 친구를 버리고 살아남았다고 온갖 사람들이 누명을 씌우고 모욕을 당했던 생존자 아이들은 십자가 돼 있기 때문에(십자의 정확한 의미 해석 불가) 아버지인 저는 ‘생존자’ 쓸 수가 없어서 ‘우리’를 찾는 데 3일이 걸렸어요. 거의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 같은데 혹시나 여러분들 주변에 분명히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명 정도만 이렇게 같이 함께할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급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주변에 이 영화를 많이 알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더레이터 :

영화에 많은 기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바람의 세월이라는 작품의 기능은 하나의 운동회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앞에서 감독님이 말씀하셨지만 이 영화를 한번 보려고 하는 노력, 이 공간에 와 있으려고 했던 노력, 저는 그거 하나도 다 그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아버님이시죠. 감독님이 이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운동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이 영화의 기능은 운동입니다. 그거에 여러분들이 조금 많이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고요. 그 참여 방법은 영화를 또 많이 보는 것도 있고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것, 그리고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 이거 하나도 저는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요. 그 기능에 조금 더 자신을 좀 적극적으로 내비치시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 이제 부산평화영화제가 15회입니다. 저는 부산평화영화제 5회까지만 하고 10년 만에 영화제를 다시 왔는데 저는 10년이라는 시간이 굉장히 짧게 느껴졌는데 제가 예전에 했었던 영화제보다 더 커져 있어서 너무 기쁘고 이번 슬로건이 전쟁 너머 평화인데요. 정말 10년간 열심히 쌓아오셨지만 앞으로 더 싸워야 하실 모두에게 힘이 되는 영화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GV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함께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감독님 마지막으로 짧게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감독님:

저는 10년 넘도록 제 이름이 다섯 글자이거든요. 지성이 아빠. 사실 세월호 관련해서 영화가 굉장히 많이 나왔지만 진상 규명에 조금 더 한 발짝 다가서서 나온 영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바람의 세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곧 진상 규명에 접근해 보려고 하는 영화가 나옵니다. 영화 제목은 ‘제로섬’입니다. 돈이 없어서 극장 개봉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지금 공동체 영화의 상영 주체자로서 참여하시는 분들을 소집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제 바람의 세월은 극장에서 문을 거의 닫았다고 보는 게 맞고요. 하지만 이 극장에 다시 옵니다. 분명히 옵니다. 언제 ‘제로섬’을 들고 올지 모르겠지만 그때 또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좀 뵀으면 좋겠습니다. 무섭고 아픈 게 아니고 우리들의 다음 날을 위해서 다음 세대를 위해서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