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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제6회 부산평화영화제/관객 리뷰

공식경쟁4 <오래된 희망>

 

 

 

밀양에 사람이 있다

 

임지민 

 

'기업하기 좋은 도시 성장하는 밀양'. <오래된 희망>의 중반 부분, 밀양 주민들이 국무총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화면에 잡히는 문구다. 국가의 공간에 기업과 경제성장과 돈의 자리만을 배치하는 힘은 그곳에서 사람의 자리를 지워낸다. <오래된 희망>이 차근차근 풀어 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생태적 보금자리를 무너뜨리고 밀양 주민들을 외면하며 작동하는 권력은 그 정당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밀양 시민들은 그들이 살아온 곳에서 그들이 살아온 방식대로 삶을 계속해나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권리는 시장에서의 물건처럼 돈을 주고 구매함으로써 처리해버릴 수 있는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상금이 부족하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밀양 주민들의 사투가 단순히 돈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다. 한전의 압력에 맞서는 밀양 사람들은 그들이 "사람을 돈으로 본다"고 울부짖는다. 한전은 밀양시에 송전탑을 건설해야 하는 이유는, 신고리 원전에서 북경남 변전소까지의 송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국가를 위해 시민들은 송전탑 건설에 응당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전은 밀양이라는 지역이 국가의 거대한 게임을 위해 이리저리 마음대로 말을 배치할 수 있는 체스판이 아니라,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하나하나의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는 인간적 공간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밀양 사람들은 켜켜이 쌓여 온 오랜 시간 동안 밀양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매일같이 그곳의 땅과 하늘과 나무를 지켜보며 살아왔다.

나무를 옮겨 심을 때에도 그것이 뿌리박은 땅에서 억지로 떼어내면 시들기 때문에 영양분을 충분히 주고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파내어 햇빛과 토양의 질이 좋은 곳에 잘 심어 준다. 하물며 사람의 생의 터전을 옮기는 일이 나무를 대할 때 못지않게 조심스러워야 함은 자명하다. 그런데 그 삶 내내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땅에서 사람을 억지로 떼어내는 폭력을 자행하려는 일이 정당화되려면,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면 된다. <오래된 희망>에서 밀양 주민들이 듣는 말을 그대로 옮겨 오자면, 그들이 평등한 사람이 아니라 '씨발년'이고 ''라면, 행정대집행은 인간에 대한 불합리한 침해가 아니므로 간단히 정의로운 것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밀양 주민들의 일상의 리듬은 아랑곳하지 않고 밤이든, 낮이든, 새벽이든 예고 없이 침입하는 짓이 아무렇지 않게 반복된다. 밀양 주민들이 사람이 아니라면 국가의 관점에서 그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들의 의미가 하찮은 것으로 전락할 때 국가의 의미는 무엇이 될까? 밀양 주민이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더 이상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국가의 무력함이 명백해진다. 밀양 행정대집행에서, 세월호의 비극에서, 용산 참사에서 국가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폭력이 도처에 있고, 국가의 의미는 의문의 대상이 된다.

<오래된 희망>은 시민들이 입을 열어 자신들의 삶의 이력이 밀양이라는 공간에 어떻게 수놓아져 왔는지 이야기하는 것을 묵묵히 담았다. 이러한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삶을 말하는 목소리는 이 영화 바깥에서는, 즉 여러 신문과 주요 방송국의 뉴스에서는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오래된 희망>에서 카메라를 향해 찍지 말라고 외치는 강압적 목소리는 대본 없이 찍힌 것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상징적이다. 그러한 강압적 목소리는 밀양 문제를 돈 문제이자 전력난의 원인으로 프레임화하고, 돈과 전기에 대해 단정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다른 중요한 문제들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오래된 희망>은 밀양 주민들의 목소리를, 그들의 얼굴과 표정을 화면 가득히 담음으로써 밀양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싸움을 단순히 돈 욕심에 대한 것으로 의미화하는 힘에 저항한다. 이 영화는 송전탑에 얽힌 한전과 대통령의 이해관계 그리고 은폐되었던 사실들을 추적해서 드러내고, 그들이 내세우는 전력난 해소라는 목표의 허위성을 폭로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밀양 사람들의 고유한 삶과, 닿기 힘든 목소리를 전달한다. 평화는 입 막힌 침묵의 고요함으로부터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자유로이 오갈 때 비로소 싹튼다. “여기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