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5회 부산평화영화제/기록문

<조선인 여공의 노래> GV

부산평화영화제 아카이브 2025. 5. 15. 15:47

일시 : 2024년 10월 27일 13:30

장소 : 모퉁이극장

참석자 : 김필남(모더레이터), 이원식 감독

작성 : 양지수

 

Q. 먼저 관객에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Q. 조선인 여공 22명의 증언과 낭독, 제언, 인터뷰 방식을 통해 그 시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다큐였습니다. 어떻게 작품을 만들게 되셨나요? 자료도 많을 것 같지 않은데 계기가 무엇인가요?

A. 2017년 다른 다큐 작업을 위해 오사카 하루키 중학교에 방문했습니다. 학교의 붉은 담벼락에 철제로 된 십자가가 박혀 있었습니다. 제가 크리스천이라 십자가가 왜 있을까 궁금해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자료가 없어서 도대체 뭔지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몇 년간 조사해보니 여공들이 일했던 공장이 중학교가 된 것이었는데, 그 십자가는 여공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철조망을 감아놨던 철제 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조사를 해보니 3만 명 이상의 조선인 여공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공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도 없고, 논문 기록 찾아보니 대부분의 기록이 일본 자료나 오래된 책에서 인용을 한 것뿐이라 직접 조사를 하기 시작했고, 영화로 만들어서 알리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Q. 해당 이야기가 위안부, 강제징용에 비해 덜 알려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잘 모르는 분들에게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전달해야겠다고 구상했나요?

A. 징용과 위안부 문제도 물론 중요합니다. 민간의 역사들은 연구하기 쉽지 않고 연구가 안 된 부분도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이야기도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처음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객이 편하게 보고 쉽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느낌보다 증언, 제언, 낭독을 통해 좀 더 감정적으로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Q. 낭독하는 분들이 재일조선인인가요?

A. 네, 한 분은 강하나 씨라고 한예종에 다니고 계세요. 귀향한 분인데 한국에 유학을 오셨습니다. 그 분을 찾아서 같이 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제가 일본에서 영화를 찍어야하니까 만날 수 없겠다 생각했는데 마침 일본에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작업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인 여공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배우가 낭독하는 것이 진정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증언을 채집한 사람 중, 1980년대 취직했을 당시에 일본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말씀하는 방식 등 달라져있는 부분이 오히려 진정성이 느껴질 것이라 생각해서 캐스팅하게 되었습니다.

Q. 조선인 여공이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감독님께서 영화를 제작하실 때 관객이 어떤 마음으로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조선 여공들에 대해 조사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오사카에서 자료 조사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국 사회가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고, 그들의 역사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고 역사의 일부인데,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관심이 부족했습니다. 할머니들은 90세 후반에 가까운 할머니들을 만나서 인터뷰할 때 죄송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영화 안에 미안한 마음을 담으려고 했고, ‘좀 더 빨리 갔으면 더 많은 증언을 확보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관객도 같은 마음을 가지길 바라면서 만들었습니다. 영화 완성 직후에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왜냐면 여전히 TV에서는 세계 곳곳의 전쟁 상황을 이야기 하고, 그 전쟁으로 인해서 아이들이 조선인 여공처럼 똑같이 일을 하거나 가족을 떠나야하는 일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 여공들의 이야기라고 보기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세계의 이야기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영화에 그런 관점을 담기 쉽진 않았지만, GV를 통해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Q. 일본에서 연구를 하는 분들을 만나보셨을까요? 만났을 때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A.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자료가 더 많고, 일본인 연구자가 훨씬 많습니다. 한국의 연구자들이 연구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하기 때문에 연구자들도 쉽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연구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분들도 많은 책임감과 이런 사실을 알려야한다는 것에 중요성을 인식하지만, 지친 사람도 많습니다. 수십 년 간 연구하고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바뀌지 않아서 지쳐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조선인 여공들은 단지 여성의 문제, 노동의 문제라고 특정지어서 생각할 수 없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처음에 시작은 침략의 역사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도 많고 취미로 연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본에도 많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분들이 계셔서 복잡하지만 그 가운데서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충돌하고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Q. 80~90대가 되신 분들을 직접 만나 뵙고 면담도 진행하셨는데 어떤 경로로 만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A. 사실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 못하고 무작정 오사카에 방문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100년이 지난 역사부터 시작되어 있고, 가까운 역사라고 해도 50년대인데 그 시기에는 방적공장이 소멸하는 시기였습니다. 50년대에 일하신 분들도 거의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엽서 제작해서 뿌리고 다녔습니다. 몇 달 동안 그 곳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 주변의 사돈의 팔촌까지 물어봤습니다. 그러다 노인케어센터에 계신 분이 여공으로 계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고, 노인센터에 여공으로 일하신 다른 분도 계셨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피해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무겁고, 어떻게 전할지 막막함이 있었는데, 실제로 할머니들을 만나 뵀을 때,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시간을 견뎌서 디아스포라 사회를 형성하고 민족의 정체성 간직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걸 보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Q. 어디에 방점을 찍고 들으셨는지 궁금합니다.

A. 저희가 질문을 요청하긴 했지만 말씀 하시는걸 다 들었습니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할머니께서 가족이랑 넘어와서 어릴 때부터 돈을 버셔야 했습니다. 오빠들은 학교에 다녔고, 할머니는 8살부터 오빠들 뒷바라지하면서 ‘밥통’이라고 불렸다고 했습니다. 그게 아직도 한이셔서 20번은 넘게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당시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 시대에 그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큰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Q. 아픈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감정적으로 내비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텐데 담담하게 진행이 된 것 같다. 의도하셨나요?

A. 의도했다기보다 할머니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정리하게 된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피해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엄청난 트라우마와 현대사의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피해의 역사로 규정해서 그 분들을 바라보는 것이 건방지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버티고 살아남으셨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대가족 형성하여 살고 계시고, 그렇기 때문에 디아스포라의 역사들이 정리되고 커뮤니티가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편으로 거시적인 관점보다는 여공들의 삶 안에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Q. 역사학자를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일단 저는 누군가 이 이야기를 정리하고 기록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1980년대에 책으로 나왔지만 추가적으로 그 이야기를 정리하고, 공장의 위치가 어디인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주소지를 찾아서 제가 촬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찾다보니 영화에 나온 히구치 요이치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나자마자 그 분은 저를 기다렸다고 하시더라고요. 누군가 자기에게 와서 다큐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분을 통해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한국 사람인 제가 찾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Q. 할머니들도 영화를 보셨나요?

A. 네 보셨습니다. 할머님 댁에 방문해서 온 가족과 감상을 했습니다. 너무 좋아하시고 많이 우셨습니다. 여공으로 일할 때, 어머니 생각이 난다고 많이 우셨습니다.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씀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Q. 마지막 엔딩 크레딧 직전에 할머니들께서 살아계시지만 음악이 가사만 전해지고 음을 찾을 수 없다는 부분이 충격적이었습니다.

A. 기록에 조선인 여공들의 노래 가사가 남아 있는 책이 있습니다. 1980년대 김찬정이라는 작가가 일본어로 쓴 책이 있는데요, 거기에 가사가 남아있어서 멜로디를 찾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 여공처럼 공장에서 낮은 대우를 받았던 오키나와 여공이 있었거든요. 그 분들은 노래 가사도 남아있고 음악과 악보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 여공들에 대한 자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조사를 했는데 찾지 못했고, 제가 못 찾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누군가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노래를 찾아서 할머니들께 전달하고 싶습니다.

Q. 마지막 인사와 더불어 작업 중인 작품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A. 여공들과 공장에 관한 이야기를 어떤 일본인이 추적하는 이야기를 이미 완성했고, 배급사가 정해져서 출품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 같고, 일본에서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저희의 삶이 있는 이유가 어떤 분의 죽음과 헌신, 가족을 지키고 고향을 떠났지만 돈을 벌어서 조국에 송금을 했고, 그 돈으로 누군가는 먹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제 저희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100년 전의 역사 때문에 한국은 시끄럽잖아요. 사실 그것은 100년 전 역사가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더 많은 관심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어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함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